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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리뷰

[ 제빵왕 김탁구 ] 뜨레빵 구일중 명예 회장 회고록

by 글벌레 2010.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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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분 뜨레빵의 구일중 명예 회장님 아시죠?

회장님께서 곧 팔순 잔치를 여실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팔순 기념으로 회고록을 낸다고 하시는데요.
그 의뢰를 저에게 하려 한다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단, 조건이 제 필력을 다시 한 번 확인 후에 맡기겠다 하시는데
그 필력 테스트를 구일중 회장님에 대한 블로깅 및 언론사로의 기사 송고로 하시겠다는군요.

그래서 이렇게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구일중 명예 회장님의 장님인 구형준(김탁구) 회장님이 
일구워 낸 뜨레빵 빵들은 즐겨드시면서도 그 뜻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뜨레빵이란 무슨 뜻인가부터 밝히고 시작을 합니다.

구일중 명예 회장님이 1957년에 거성 식품을 창립한 이후, 1980년대까지는
거성식품의 빵들이 무지막지하게 팔렸었죠.
신제품 빵들도 상당히 출시되면서 말이죠.
진빵이나 만두를 집에서 손쉽게 먹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 호빵부터, 호떡을 응용한 빵 등등....

그러나 1980년대 말, 특히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대량 양산빵의 시절은 점점 시들어가고
고구려당, 태극기당, 가야명과, 이태리 바케트, 줄래말래 등등의 고급스러운 handmade 스타일의
빵을 공급하는 제빵점들이 인기를 끌게 되죠.

이런 스타일의 제과점들에 밀려 점점 시들어가는 거성식품을 살려낸 것은
구일중 명예 회장님의 장남인 구형준 회장님이죠. 구형준 회장님께서는 1997년 IMF 여파로 늘어난
노숙자들에게 거성식품의 대량 양산 빵을 무료 급식하여, 거성식품의 인지도를 다시 한 번 높이고 난 후
드디어 1999년 거성의 제 2 브랜드인 뜨레빵을 창립하여 위에 열거한 고급스러운 핸드메이드 스타일 빵집들을
피박에 광박 양박을 씌워서 싹쓸이 해 버리는 성과를 일구어 내시죠.
지금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아까 저녁에 집 앞 뜨레빵 제과점에서 사다 놓은 빵들을 먹고 있는데,
이제 막 구운 듯한 촉감과 향기, 정말 맛있네요.
여러분들 중에는 뜨레빵 매장에 들락거리면서도 그 뜻을 모르시는 분들도 계셨을 터인데요.

뜨레빵이란 들의 빵이란 뜻입니다. 즉 , 우리나라의 들을 일구어 거기서 나온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재료들을 사용했다는 뜻인데요. 거의 수입 밀가루에 의존하던 제빵업계에 상당히 부족하게 
생산되는 우리 밀을 도입한 게 구형준 회장님의 새로운 시도이기도 했구요.....

그럼 이제 구일중 명예 회장님께서 저에게 주신 일차 자료들을 바탕으로
구일중 회장님의 회고록의 뼈대를 잡아볼 터인데요.
일차 자료를 기반으로 회고록의 뼈대가 될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놓은 후에는

구일중 회장님의 차남이신
구마준 기획본부장님에 대한 구일중 명예 회장님의 회고를 녹음한 테이프를 제가 들으면서
여기 받아써놓도록 하겠습니다. 이 테이프은 회장님께서 글로 그대로 옮겨 달라고 특별히 보내 주신 테이프고요.

글에 앞서 제가 구일중 회장님 회고록을 집필하게 되어 돈 좀 벌게 추천 꾹꾹 눌러주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 ^* (앗 , 이런 걸 써 놔도 될까???)

참고로 말씀드리면 형식은 회고록이지만 글을 쓰는 시점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소설처럼 서술하기로 구일중 회장님과 합의를 했습니다. 

 이 땅 위에 풍요를 바라며 달려온 지난 날들을 회고하며...구일중

 

구일중 회장은 1930년 무덥던 어느 여름 날,
충청도 지역에서 내노라 하던 대지주였던
구영수 옹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시절이 일제에 의해 조국 산하를
강점 당한 때이긴 했지만, 워낙 재산이
많았고, 또 일제에 정기적 기부를 많이 하는
아버지 덕에 구일중은 편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옛말에 내 배 부르면 노비가 배곯는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구일중의 아버지 구영수는 자신의 소작농들이
혹시나 굶지는 않는지, 혹시나 너무 어려워 고리대를 가져다가 써서 혹 소작료 이외의 돈을 전부 다 이자로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마치 자신의 친자식들을 돌보 듯이 그들을 돌보았다.

사실 영수의 이러한 행동은 지금은 잃어버린 조국의 동포들을 자기라도 돌봐 줄 수 있는 데까지는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한 그였기에 일제에 많은 기부를 하며 친일 인사로
일제 총독부에게 인정받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복군의 뒷돈을 대고도 있었다.

구일중도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사람을 돌본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많은 생각을 하였음에도, 사실 어린 일중에게 그러한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가슴 깊이 와 닫는 명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그에게 사람들을, 이 땅위에 배곯는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게한 것은
그가 중학교 4학년 때인 1944년,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당시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해 가는 과정이라 군수 물자를 위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수탈은 더 심해지고  
조선 사람들의 어려움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944년, 어느 여름날 교복 하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던 구일중은 똥을 밟는다.
<아, 똥 밟았어, 재수없게시리....>라고 생각하면서 구일중은 길가 옆의 실개천으로 내려가
신을 벗지는 않고 운동화 바닥을 개천에 담고 살살살 발을 흔들었다.
운동화에서 떨어져 내려가는 똥을 보니 큰 걸 밟기도 밟았다 싶었는데,
떠내려가는 똥을 따라가던 그의 눈길에 실개천가에 모여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씻고 있는
허름한 한복, 원래는 흰색이었을 터인데 마치 검정색 한복처럼 보이는 꼬재재한 옷들을 입고 있는
나이가 많아야 제일 큰 아이가 소학교 3학년이나 되었을 법한 여자 아이 셋이 보였다.
구일중은 저 허름하고 꼬재재한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 무엇을 씻고 있는가 궁금해 
그 아이들 옆으로 갔더니 아이들은 누군가 먹다가 길에 흘려서 뭉개진 것 같은 삶은 옥수수를
열심히 씻고 있었다.

<니들 뭐하냐?>란 구일중의 갑작스런 질문에 일중을 뒤돌아본 아이들은 놀랐는지 눈만 커진 채
씻던 옥수수를 뒤로 감춘 채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었다. 일중이 보기에 아무래도 아이들은 그걸 먹을
요량으로 보였다. 일중의 어린 가슴에 갑자기 짠하는 느낌이 몰려왔다. 일중 자신은 사실 살아오면서 하얀
쌀밥을 먹으면서 살아왔기에, 이 어린 아이들이 저런 걸 먹으려고 했다는 것이 가슴에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너네 집은 어디야? 아빠, 엄마는 어디 계시니?>일중의 물음에 고개짓만 설레설레 하던 아이들 중에
가장 큰 아이가 <집 없어요. 아빠 엄마두.....>하면서 말꼬리를 내렸다.
그 말을 들은 일중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나려던 것을 참고, <그래? 그럼 니들 나 따라와.
오빠가 쌀밥 줄게.>라고 말을 했다. 쌀밥이란 말에 아이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걷히고 미소가 도는 것을
일중은 보았다. 

자신을 따라 걸어오는 아이들을 뒤에 달고, 집으로 가는 일중은 승재를 떠올렸다.
일중의 소학교 시절 아버지 영수는 어느날 갑자기 집에 한승재라고 꼬재재하기 그지없는 아이를 데려오셨다.
그리고 일중에게 <너와 동갑이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라고 말씀을 하셨었다.
어머니 말을 들으니 승재는 아버지가 길에서 주워온 아이라는데, 아버지는 이상하리만큼
승재를 이뻐해 주셨다. 일중과 같이 소학교를 다니게 하고, 또 일중과 같이 중학교를 다니게도 하셨다.

사실, 일중에게 있어 아버지의 사랑의 일부가 승재에게 가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는데,
오늘 일중은 아버지가 승재에게 느꼈던 마음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길에서 승재를 본 아버지의 마음도 지금 자기 마음처럼 아팠으리라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대문에 들어선 일중은 <어머니? 어머니?> 하고 어머니를 찾았다.
그 부름을 듣고 공주댁이 나왔다. <마님, 주인님이랑 잠깐 어디 가셨는데...>하고 공주댁이 말을 하다가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이 아이들은 누구예요? 도련님?>하며 일중을 부끄러운 듯 쳐다 보았다.
<공주댁 아줌마, 이 얼라들 쌀밥 좀 먹여 주고 옷 갈아입혀서 머물 수 있는 방 하나 청소해 주세요.>
라고 대답을 하면서 일중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사실 공주댁을 일중이 아줌마라고 부르지만 공주댁은
일중보다 겨우 일곱살 많은 젊은 과부였다. 일제에 징용을 끌려간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어 어렵게 살던
공주댁을 어머니 홍여사가 집에 데려와 집안을 맡기면서 일중 집안 일을 담당하는 집사처럼 된 여자가 젊은
공주댁이었다.   

집 안을 둘러보던 일중은 < 아줌마, 승재는 아직 학교에서 안 왔어요?>라고 물었다 . 
<승재, 아까 와서 가방 던져 놓고 이번 비에 소작농 논들은 괜찮은지 한 번 둘러본다고.....>라고 대답하던
공주댁은 아이들을 쳐다보며, <니들 얼른 좀 먹고 우선 씻어야겠다. 따라와라.>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부엌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식, 오지랖 넓긴..... 아버지가 공부하라면 공부나 하면 되지.... 완전 아버지 비서라니까.....>
공주댁으로부터 논들을 둘러보러 나갔단 대답 속의 승재를 떠올리며 일중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 저 아이들 봐.... 앞으로는 승재랑도 친하게 지내고 잘해 주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1945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날, 영수와 홍 여사 그리고 일중과 승재는 라디오 앞에서
일본 천황의 우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드디어 이 땅에 해방이 온 것이었다.
모두가 기뻐했지만, 꼭 그럴 것만도 아니었다. 

해방이 되었다고 하지만 길을 걷다가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은 더 많이 보였고,
또 어디서는 친일 지주 집이 습격을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구일중의 집은 그런 분위기에서도 김미순의 집과 더불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사실, 김미순의 부(父)라는 사람은 친일 행각이 얼마나 심했던지, 일제 강점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자기 고향 전라도에서는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전라도에 있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일중의 집 근처로 그 기반을 옮긴 지주였다. 물론 그가 사람들을 일제에 발고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심하게 일제에 붙어먹고 살았는지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서 엄청 미움을 샀던 것이다.

그런데 미순이 아빠는 그런 그의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사람 하나는 유들유들하니 사교성이 좋았다.
영수는 이런 미순 아빠와 친하게 되었고, 심심한 날이면 미순 부와 마주 앉아 탁주 사발을 주고받으며
바둑을 두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친해진 두 사람은 일중이 보다 열한살이나 어린 미순이가
이다음에 크면 일중과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사람 좋고 일중 아버지와 친해졌다고 해서 그의 일제에 붙어먹으며 사는 기질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일중의 고향 이곳에서도 해방 후 습격 당하기 딱 좋은 그런 스타일의 지주였는데....

광복군의 뒷돈을 대주러 만주에 왔다갔다 하던 사람은 일중의 고향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미순네가 일중네 근처로 이사온 후 일중 부 영수는 그에게 광복군에 가져다 줄 뒷돈을 줄 때마다 
여기 미순 아버지가 준 얼마도 들어가 있네라고 말을 해 주었다. 물론 미순 아버지는 거기에 땡전 한 닢
넣지 않았지만, 영수는 일제에게 큰 두려움을 느껴 일제에 붙어먹는 미순 부를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미순 부친도 광복군의 뒷돈을 대는 일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영수는 일본이 성전이라
부르는 이 전쟁이 몇 년 안에 일본의 패배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일중과 승재가 이제 막 종강을 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 주의 
일요일에 북이 남침을 했다는 급박한 뉴스를 듣게 되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국군이 승전에 승전을 거듭해
북으로 진격을 시작했다고 나오기 시작했지만, 영수는 심상치 않은 소문들을 듣고 있었다.
벌써 몇몇 지방에서는 빨간 완장을 차고 죽창을 들고 설치기 시작한 사람들이 인민 재판으로
지주들을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이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영수는 부산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하고, 땅을 들고 갈 수는 없지만,
땅문서와 돈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챙겨 피난길에 올랐다. 다행히 영수에게는 사람들은 많았다.
집에만 해도 공주댁 그리고 승재를 비롯해, 평소에 그가 길에서 주워온(?) 불우했던 아이들.
그리고 거의 가신 수준에 있었던 소작농들, 영수는 그들과 더불어 자기 것 뿐만이 아니라
미순이네 집에서도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다 싸 들고 다 함께 부산으로 내려갈 수가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 영수와 미순 아버지는 국군에게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대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조국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을 위한 물자를 대는 것이라 거의 원가 보존 차원에서 돈을 받아
이문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러한 사업에 일중과 승재를 동참시킴으로써 영수는 그들을 전장에
보내지는 않아도 된다는 보증을 받은 셈이 되었으니 영수는 그것으로 만족이었고,
사람 좋은 미순 아버지도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미순을 바라보며, 영수에게 <우리 사위가 전장에 안 나가도
되니 이 사업이 좋은 사업일세!>라고 말하곤 했다.

일중과 승재는 군에 보낼 빵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여러 빵집들을 다니며 계약을 하고 빵을
조달했는데, 그중에 팔봉빵집이라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수염을 그리 이쁘지 않은 모양새로 기른
빵집 주인이 <그래? 일중과 승재 왔는가?>라고 하면서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런데 일중이
그 빵집을 들락거리면서 눈여겨보게 된 것이 있었으니, 팔봉빵집의 주인은 길을 지나가는 굶주린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에게 자주 빵을 거저 집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빵을 먹는 아이들 얼굴에 떠오르는 환한
미소. 그 미소가 지난날 개천가에서 옥수수를 씻다가 쌀밥이란 소리에 환하게 미소짓던 세 자매의 얼굴과
겹쳤다. 그 세자매들도 지금 부산에 같이 와 있었고, 그중 제일 큰 아이는 이제 십대 중반이 되어
아버지의 사환으로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일중은 밤 시간에 팔봉빵집 주인, 팔봉 선생으로부터 제빵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년이 지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일중은 아버지의 병환에 큰 시름에 빠진다.

그렇게 높은 산으로 보이던 아버지가 거동조차도 못하는 병환을 얻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난 후, 일중은 승재에게 집 안일들과 어머님을 부탁하고, 자신은 팔봉 선생이
자리를 잡았다는 인천으로 가서 팔봉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또 삼 년을 배워서 육 년 동안 제빵을 배운 일중은 자신의 고향 청산으로 돌아와
제빵점이 아닌 조그마한 제빵 공장을 세우고, 자신이 꿈꾸는 대량 양산 빵 생산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 때가 1957년이었다. 

일중이 소작의 관리는 승재에게 맡기고 자신은 빵 공장을 세우는 등 여전히 이전에 아버지 영수가 하던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반면, 사람은 좋은 미순 부친은 자동차를 만드는 사업을 해 보겠다며 자신의 농지들을
처분해 조그마한 자동차 공장을 세운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나온 1호차를 시험 운행한다며 자신의 아내까지 태우고 신나게 달리다가 다리 위에서 개천으로 차를 꼬라박고 두 사람이 모두 죽어 버리니 이 때가 1955년이었다. 

일중의 어머니 홍 여사는 그들 내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홍 여사가 원래 미순 모와 친하기도 했지만, 영수가 죽은 뒤로는 미순 모가 어머니 홍 여사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더 커졌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던 홍여사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에
천애고아가 된 미순을 일중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1959년, 일중은 열심히 일을 했지만 아직 작은 공장에서 나오는 빵을 가지고는 현상 유지도 힘들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배 곯은 자들을 빵으로 배 불리겠다는 그의 포부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였다.

스스로 사장이자 제빵사의 일원이기도 했던 일중은 하루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외지에서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니던 미순이 집에 다니러 와 있었다. <사장님 오셨어예?>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일중 오빠, 오빠 하면서 따르던 미순이는 언제인가부터는 자신을 사장님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식사 안 하셨지예? 지가 빨리 차려 내오겠심더. 오늘은 공주댁 아줌마가 몸이 아파 일찍
잠들어 가지고예...> 이렇게 말을하면서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이제 막 열아홉이 되어 처녀티를 물씬
풍기는 미숙의 향기와 부피감은 일중에게 대단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미순이 밥상을 차려다 놓고 부끄러운 듯 방으로 돌아간 뒤, 
< 저 아이, 내 동생처럼 커 오는 것을 보아 온 저 아이. 미순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혼처라도 잡아 줄 수
있으면 좋을 터인데....그러려면 대학을 보냈어야 하는데.....> 밥을 먹던 일중은 미순이를 떠올리며 
자기가 세운 공장이 생각만큼은 사람들을 먹이지도 못하고 돈을 벌어들이지도 못하기에, 소작료 받는 것도
예전만은 못해 미순을 대학에 보내지는 못한 것을 안타까와 했다. <미순이 아빠가 나보고 우리 사위, 우리
사위 하고 부르던 말처럼 내가 진짜 저 아이를 거두어 잘 보살펴야 하는 것 아닐까?>살림을 좀 줄여서라도
지금이라도 미순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일중은 수저를 놓았다.

며칠이 지난 뒤, 어머니 홍여사가 일중을 불러 앉혔다.
서인숙이랑 결혼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배곯는 사람들의 배를 빵으로 채워 주겠다는
너의 포부가 더 빨리 이루어지지 않겠냐고? 
서인숙, 그녀의 집 안은 부유했다. 그녀와 결혼하면 빵 공장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내가 미순이를 저버리면 저 아이는 어떻하지? 일중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인숙이는 승재가 좋아하는 여자 아니던가? 물론 거의 승재 혼자 그녀를 좋아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일중은 어머니에게 < 한 사람의 가슴이 아플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일중이 미순의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아까 아침 나절에 미순을 불러
<내가 너랑 일중이랑 혼인을 시키면 좋겠지만, 이제 일중이는 나이도 꽉 차고, 또 요즘 일중이 어려운 것은 알지? 내 이런저런 거 따져 보니 어쩔 수 없이 서인숙이란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여야겠구나...>라고
말했을 때 <그라입시더. 지는 괜찮심더.>라고 말하던 미순을 떠올리며, <그 아이가 그러라고 했다>라고
일중에게 말을 했다. < 음, 승재가 인숙이를 포기했었나 보구나. 하긴 인숙이가 승재에게 눈길을 별로
안 주니....>어머니의 대답을 들으며 일중은 승재가 인숙을 포기하고 있었구나라고 여기게 되었다.

일단 여기까지가 받은 자료를 정리한 것이고요.

아래 참고로 구일중 명예 회장님 자제분들을 밝혀 놓습니다 .



큰 딸 - 구자경 : 1961년생.
작은 딸 - 구자림 : 1964년생.
큰 아들 - 구형준(김탁구) : 1965년 5월생.
작은 아들 - 구마준 : 1965년 9월생.





 내 사랑하는 아들, 마준이에게 못다한 말들


사람들이 말을 해. 내 아들 마준이가 내가 미워해서, 천대를 해서 나보다 일찍 죽었다고.....
그런데 말이지. 마준이도 내 아들이야. 내가 미워할 리가 있나?

다만 나는 마음은 안 그런데 표현에는 좀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이야.
무정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되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무정했냐면 ...
사실 , 내가 그 아이 미순이를 건드려서
애를 가지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쯧..

어쨌든 내 아이를 가지게 된 미순이가 아이 이름을 뭐라 할까 물어올 때도 난 신문을 보다가
마침 읽고 있던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서울 유치 기사 헤드라인을 보고
탁구라고 지으라고 말해 줬었지...높을 탁에 구할 구를 써서 탁구라고 하라고.....

참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어이없게 무정한 데다가 이름이 탁구가 뭐야? 탁구가?
그러면 바로 해도 구탁구고 꺼꾸로 해도 구탁구고 참....

내가 좀 원래 그랬어. 그렇지만 그 때 남자들 대부분이 다 그랬어. 
그 당시에는 미운 놈은 떡 하나 더 준다고 이쁜 자식은 오히려 속으로만 사랑해서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정서가 아버지들에게 일반적이었거든.......

탁구가 사라진 일요일 날 아침에

마준이가 자기도 제빵 수업을 받겠다고 내 앞에 섰지. 나는 마준이에게 제빵 수업을 받으라고
말힌 적은 없었지만, 이제까지 빵이라면 별 관심없던 내 자식이 빵을 배운다니 탁구는 왜 안 왔냐고
묻지도 않고 마준이를 그날부터 가르쳤지....

나중에 탁구가 남긴
편지를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지만, 그래도 마준에 대한 수업은 계속되었어.

마준이가 천재야? 다 커서 일본 이 년 갔다와서 나중에 내 스승 팔봉 선생님도 놀랄 만한 제빵 기술을 가지게?
다 내가 어려서 기초를 잡아준 덕이지......

그렇지만 마준이 이 녀석은 배우면서 내 속을 많이도 뒤집었어.
언젠가부터는 또 배우기 싫다고 일요일 날 아래채로 오지도 않고, 또 조금 크더니 웬 여자들이랑
그렇게 말썽을 부려? 뭐 물론 여자 문제는 이 애비도 흠결이 있기는 하지만.....
마준이는 해도 너무했어.... 젊은 여자애들 숱하게 울렸지... 

내 입장에서는 마준에게 살 같이 굴 수는 없었지......
물론 나는 생겨 먹은게 그렇지도 못하지만..
만약 내가 살 같이 굴고 그랬다고 해 봐. 마준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제빵 기술을 가졌겠어?
아마도 그 아이는 꿈도 없는 아이가 되었을지도 몰라......

내가 마준이가 팔봉 선생님의 테스트를 받는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마준이가 대견했는지 몰라.

정말 진심으로 그 아이가 그 테스트에서 
통과해서 명실상부한 내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었어.

그럼 또 묻겠군.
왜 그렇게 생기지도 못한 사람이 탁구에게는 
그렇게 살 같이 굴고
마준이 탁구 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 분노했냐고?

그런데 말이야.

자네들 아픈 자식을 돌본 적 있어? 자식이 여럿이더라도 아픈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만 눈에 보여.
신경이 온통 그 아이에게만 가지. 어쩔수 없는 거 아닌가?

내게는 탁구가 그런 아들이었어. 내가 태어나게 해 놓고 아무 것도 못해 준 그런 아들.
마치 내 손톱 밑의 가시 같았단 말이야.....

그런 아들을 내가 찾는다는 걸 마준이 알았는데, 나에게 안 알려줬으니 내가 화가 났지.
그리고 마준이 녀석, 끝까지 탁구를 형이라 안 부르더라구....
회장실로 와서 무릎을 꿇고도 그 자식, 그 녀석이라더군 .
그때 형이라고만 했어도 내가 마준을 안아 주었을 터인데 말이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준이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야.
난 아버지가 당신의 아들도 아닌 길에서 주워온 승재한테 잘해주는 것만 보고도 
질투가 났었는데.... 마준이 녀석은 오죽했겠어?

내가 비록 내 손 밑의 가시 때문에 마준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는 못했었지만.......
나 마준이를 사랑했네. 사랑했어. 사랑했다구.
그 녀석의 심정도 이해를 했어.

이제 곧 나도 마준이 곁으로 가겠군.....
마준이를 다시 만나면 이제 내가 내 잘못은 빌어야겠지.
그리고 마준이에게 말해 주어야겠지.

이 애비는 마준이 너도 사랑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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