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에서 8월 29일 일요일에 자유인 이회영(부제 - 해방을 향해 쏴라)이라는 드라마를
시작하였다. ( 총 4부작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일전에 이 드라마가 5부작이라고 어디선가 봤고,
시작을 일요일에 했단 점을 감안하면 5부작이 맞을 것이라 판단한다. 물론 그것이 경술국치일에 맞춘 면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려면 우선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 정도는 알 필요가 있어
그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부터 한다.
아나키즘이란 단어는 단순히 무정부주의라고 간단히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히 무정부주의라고 해 버리면 오해의 소지가 발생하게 된다.
아니 무정부주의자들이 웬 무장 독립 운동을 했는가란 물음이 그 오해의 시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말하는 무정부주의는 개인을 심하게 억압하는 조직 및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지
민족이나 조국까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나키즘에도 그 분파가 많지만,
일제 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 민족끼리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 가능한 공동 자치를 하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다는
공산주의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확연히
구별이 된다. <조선상고사>란 역사서의 저자로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는 항일 독립 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도 아나키스트였다.
이회영은 누구인가? |
옆의 사진을 보면 이시영이란 이름이 보인다.
이 이시영이 바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하셨던 분이다.
대한민국 첫 부통령이 된 이시영을 동생으로 둔
우당 이회영은
명동 성당 맞은편 현 YWCA 자리에서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1867년 4월 21에 태어났다.
그는 이항복의 십대손으로, 그의 가문은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조선 최대 명문가에 속했다.
그러나 이회영은 기울어진 조선을 바라보면서 전통적인 사대부의 길을포기하고
신학문을 선택함으로써 기울어져 가는 조선에 도움이 되고자 마음을 먹는다.
신학문을 선택한 이회영은 개화사상에 일찌감치 눈을 떴으며 ,
그러한 그의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그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 김구, 이승만, 신채호, 이준 그리고 이상설 등과 더불어
상동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신민회도 구성하여 독립 운동의 핵심 일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는 데는, 그 배후에 이회영이 있었다고 한다.
고종의 시종장인 조정구를 통하여 이회영은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이회영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때까지 국내에 침투한 일본 세력에 저항해
후진 양성, 집회, 을사오적 처단 시도 및 통감부 습격 등 대일항쟁을 펼치지만,
경술국치를 당해 조선이 그 주권을 완전히 잃자, 이회영 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망명길에 올랐다.
명동 일대의 부동산 등 그들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600억이 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형제들 및 그들과 함께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40여명의 식솔들은 항일 독립 투쟁에
그들의 일생을 바친다.
1945년 광복 때, 이회영 6형제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이시영 단 한 명이었다 한다.
자유인 이회영 1회를 통해서 본 이 드라마의 개괄적 리뷰 |
드라마는 그의 나이 65세이던 1932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이때는 우당이 일경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죽음을 맞이할 시점에서 일 년도 안 남았을 때이다.
1932년, 천진으로 발령을 받고 온 일본 기자,
기무라 준페이는 우연히 이회영과 그를
따르는 아나키스들이 대일 무력 항쟁의
일환으로 상선을 폭파시는 현장,
일본 대사관을 폭파 시키는 현장에 있게
된다. 대사관 폭발 현장에서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기무라는, 그가 이회영인지는
모르고, 폭발 현장에서 너무 태연한
한 노인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그가 흑색공포단이라는 아나키스트 집단의 수장이라는 것을 안 기무라는 왜 조선 최고 귀족 집안 자제가
-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
테러 단체의 수장이 되었는가 하는데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이회영의 대일 무력 항쟁의 현장들을 통해 그의 뒤를 쫓게 된다.
1회는 이회영을 만나 보려는 기무라의 노력을 주로 담은 것으로 볼 때, 드라마는 기무라의 취재와
기무라의 이회영 인터뷰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회영의 과거 행적들을 되짚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지만 드라마가 이회영의 죽음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당연한 구도로 보인다.
또한 KBS의 자유인 이회영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기무라는 이회영을 취재하고 인터뷰하면서
대일제국의 실상이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데에 고뇌를 한다고 한다.
(물론 그는 그 고뇌에 대한 어떤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회영의 이야기들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스토리 텔러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 시절, 무력 항쟁 독립 투사로서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회영의 생애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대일 무력 항쟁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에 이 드라마는 큰 의미를 지닐 것으로 본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대일 무력 항쟁이 가지는 의미 |
일본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에도 일본 국민 전원 옥쇄의 결의를 다지며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지자 그때서야 무조건 항복을 결정한다.
아마도 싸워 보기도 전에 일본 전역이 원자 폭탄으로 날아갈 것이란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택하게 하였을 것이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일본은 전쟁을 몇 년은 더 수행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실 일본은 그만큼의 전쟁 수행 능력이 있었던 게다.
전 세상을 상대로 홀홀단신으로 전쟁을 수행한 나라는 아마도 독일과 일본 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만큼 강했다.
만약 그들이 무역 마찰 및 금수조치를 이유로 1941년에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았었다면,
그래서 미국의 직접적인 태평양 전쟁 개입을 촉발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이 수행하는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미국의 원폭 투하는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었다면,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만의 대일 무력 항쟁을 통해
조선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절대 아니다가 맞을 것이다.
일본은 앞서 언급한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만약 극단적으로 가정을 해 본다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소련과 미국이 조선은 니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진공해서 되찾으라고 했다고
한다면, 당시의 우리 무력 세력은 패망한 일본의 병사들이 지키던 조선 땅 되찾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렇다면 무장 독립 운동은 의미가 없는 것 아니었던가?
가만히 앉아 있었어도 독립은 되었을 것 아닌가라고 반문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합방을 당하고, 주권을 빼앗긴 뒤 수탈을 당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그들의 말을 다 듣기만 했다면,
우리나라는 1945년에 어떻게 되었을까?
1945년에 우리는 미국의 한 주로 편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서 몇십 년 후에 미국이 독립을 시켜 주어 독립 국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독립이 된 순간 우리는 북한의 침략을 받아 이 땅은 공산화가 되었을
공산도 컸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일제에 목숨을 바쳐 항일 무력 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름조차 없이 죽어간 항일 운동가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마치 한국 전쟁 때 학도병들처럼.......
그들의 그런 주검을 목도한, 죽음을 전해 들은 우리 민족 각 개인 개인의 가슴에는
우리가 독립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결의가 또 다시 새롭게 쓰여졌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민족은 대일 무력 항쟁가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정신 무장이 되었을 것이다.
나라를 되찾아 한다는 민족적 각성, 일제의 수탈로부터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각성.
체포된 무력 항쟁가들에게 행하여지는 일제의 만행 속에서 과거의 우리는 분을 쌓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매일 같이 가슴에 새로 써 나갔을 것이다.
나라를 잃었던 그 긴 시간 동안,
무력 항쟁가들이 과거의 우리들 가슴 속에 목숨으로 써 내려간 정신, 그것은 바로 민족정신이었다.
그것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정신인 것이다.
그렇기에 대일 무장 항쟁 독립 운동가들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 밖에 없고,
그들의 행적은 빛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 KBS의 특집 드라마가 그들이 갖는 그런 의미를 아주 잘 살려주기를 기대하며
이만 이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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